안녕하세요, 스포카에서 제품 디자인을 하고 있는 김동환(Donny)입니다.

저는 이전에 콜드체인 이커머스와 O2O 매칭 서비스 등 B2C 제품 위주로 경력을 쌓아 왔고, B2B SaaS는 스포카에서 처음 경험했습니다. 이곳에서 제품을 만들며 디자이너로서 느낀 경험과 몇 가지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비슷한 도메인이라도 데이터를 중시하는 조직이 있는가 하면, 직관을 더 선호하는 조직도 있을 것입니다. 사업 분야, 규모, 조직의 성향과 전략에 따라 개인의 경험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제 경험이 모든 B2B 조직을 대변할 수는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첫인상

일단 이전에 담당했던 서비스들에 비해 제품 복잡도가 세 배는 더 높게 느껴졌습니다.

Vertical Solution답게 해결하려는 고객의 문제와 환경이 매우 특수했고, 서비스 정책 간의 상호 연관성과 깊이도 상당했습니다.

예를 들어 키친보드에서는 전처리, 선주문, 레거시 ERP 호환 등 기존 식자재 매장의 특수성이 존재했으며, 운영 방식을 충분히 이해한 후에야 제품 개선이 가능했습니다.

제품을 알아가는 과정

조금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유저가 되어보려는 노력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습니다.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고, 일상과는 거리가 먼 제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소비자의 입장에서 공감하거나, 퍼널을 따라가 보는 체험만으로는 개선점을 도출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이 툴을 업무에 사용하는 사람의 시선과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B2B 제품은 특성상 기능이 많고 활용 형태도 다양했기 때문에, 입사 초기에는 이전 리서치 자료를 꼼꼼히 읽고, 다양한 방식으로 툴을 사용해 보며 제품을 익혔던 기억이 납니다.

쉐도잉이 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명확한 역할과 상황, 목표를 설정한 뒤, 메소드 연기처럼 진심을 담아 제품을 사용해 보는 체험 방식입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일부러 사전 학습을 최소화한 채 제품을 탐색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해도가 낮은 이 시기에 Happy Case를 따라가며 제품을 경험하는 것이 기존 디자이너들과는 조금 다른 관점으로 제품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와 직관 드리븐

제품 개발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부분의 일감은 고객 인터뷰를 기반으로 진행됩니다.

이 점은 Micro A/B 테스트를 진행하며 정량 데이터에 많은 가치를 두던 이전 조직의 환경과는 달랐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이었습니다.

제품 개발 방식이 이런 모습을 갖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트래픽이 적습니다

B2C 서비스 같은 경우 보통 십만에서 백만 단위의 트래픽이 일반적이지만, B2B는 유저 수 자체가 굉장히 적습니다. 대신 LTV나 CAC 관점에서 한 명 한 명의 유저가 훨씬 더 비싸고 가치 있는 편입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트래픽 기반의 A/B 테스트 같은 실험을 반복하며 제품을 개선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실험 기간을 길게 잡더라도 제품 내·외부의 변인을 통제하고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를 얻기 힘든 조건입니다.

지표 왜곡이 일어납니다

단순화 한 사례로 말씀드리자면, 아래 그래프는 매장이 앱에 들어와 주문을 완료하기까지의 구간별 잔존율입니다. 그래프만 보면 본격적으로 상품 탐색이 시작된 이후에는 중도 이탈이 거의 없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애초에 탐색부터 시작하는 구매 퍼널이 과연 유저의 80%를 끝까지 이끌 수 있을까요? 모두가 정말 만족하고 있는 걸까요?

유저 인터뷰와 VOC를 통해 주문 과정에서의 불만 사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쉐도잉을 해보니 정말 헉 소리 날 정도로 불편하더군요. 그렇다면 왜 이런 불편함은 데이터로 보이지 않았을까요?

바로 매장은 주문을 하지 않으면 장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불편해도 매장은 생업을 위해 주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용성에 상관없이 이탈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그냥 다른 커머스로 시켜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매장은 한 유통사와 오랜 시간 거래하며 신뢰를 쌓아 온 관계를 쉽게 바꾸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업무에 사용되는 제품에서는 사용자의 행동에 제약이나 강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지표 왜곡이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유저 인터뷰가 문제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물론 정량 지표 역시 경향을 관찰하는 보조적 도구이자, 배포 이후 성과를 측정하는 데에 활용됩니다. 엄격한 통계적 유의미함을 갖추기보다는, 편향 가능성을 인정하고 사용하는 편입니다.

빛나는 디자이너

인터뷰 드리븐은 특히 디자이너에게 매력적인 환경인 것 같습니다. 숫자만으로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시각 산출물로서 논리를 이어갈 수 있다는 점에서 디자이너의 Super Power가 부각된다고나 할까요?

그동안 0.1% 앞에서 얼마나 많은 논리와 디자인이 매몰차게 거부됐나요. 데이터 드리븐 환경에서는 직관이 거의 죄악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유저 행동의 행간을 읽고, 여러 형태의 근거를 모아 판단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것의 가치가 온전히 전달되었는지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제품 사용 설명서

유저에게 제품을 이해시키는 방법으로 FAQ, Help 페이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또한 신기한 점 중 하나였습니다.

제품 특성상 기능이 많기 때문에 어중간하게 요약해 설명하거나 복잡도가 높은 화면을 만들기보다는, 과감하게 사용 설명서로 링크를 시키거나 온보딩을 담당하는 영업팀에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풀어나가는 점이 새로웠습니다.

페르소나의 중요성

사실 B2B, B2C를 떠나 우리의 제품과 기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대한 뾰족한 설정은 너무나도 기본적인 부분입니다.

하지만 초기 B2B 같은 경우, 고객사 하나하나가 소중하기 때문에 모든 요청과 의견을 동일하게 평가하는 실수를 자주 저지릅니다.

페르소나가 없다면 정말 필요한 문제에 힘을 쏟지 못하고, 이런저런 업무를 맴돌며 늘 바쁜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천천히 문제 정의부터 돌아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급자만 만족하고 정작 사용자는 외면하는.. 표면적인 문제만 해결하는 무언가를 만들 확률이 아주 높아집니다.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본질

B2B든 B2C든 본질은 똑같았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왜 제공할지를 뾰족하게 정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

쉬워 보이면 쉬운 일이고, 어렵게 느껴지면 너무나도 어려운 그 본질 자체는 같았습니다.

시장 관점에서 B2B

마치며, 여담으로 사실 B2B 도메인을 선택한 데에는 시장 관점의 판단도 있었습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B2B는, 쉬운 문제가 대부분 해결된 시장에서 여전히 성장 동력이 많이 남아 있는 영역으로 보였습니다. 고객 영업과 획득이 어렵지만, 그만큼 Lock-in도 강해 변동성이 큰 시장 상황에서도 현금 흐름을 예측할 수 있고, 하방이 비교적 단단하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열광했던 폭발적인 J 형태의 성장 곡선은 기대하기 어렵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구조임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지금처럼 저성장·긴축·불안정성이 높은 시장 분위기에서는 오히려 더 매력적인 포지션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뭔가 주식 블로그처럼 마무리된 느낌이네요. 아무튼, 이런 도전적인 시기에도 유·무형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메이커 여러분 모두를 진심으로 응원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포카에서는 “식자재 시장을 디지털화한다” 라는 슬로건 아래, 매장과 식자재 유통사에 도움되는 여러 솔루션들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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